반 토막 인생(1)
은혜는 주먹만 한 큰 송이의 노란 국화를 좋아했다. 화실 문을 열고 들어 설 때면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이 물감냄새와 범벅이 된 국화 향이었고, 국화꽃을 바라볼 때면 은혜가 생각났다. 까만 투피스에 노란 송이의 국화꽃을 들고 들어 설 때면 은은한 그녀의 바람에 취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넋 놓은 가슴이 되곤 했다.
은혜는 그렇게 왔다. 한가해진 금요일 아침. 장마 비처럼 하루 왼 종일 구질구질 하게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화실바깥 풍경은 물기 머금은 창문들이 제각각의 모양으로 흘러내리며 쌓여있던 먼지와 함께 유리에 썬팅 된 석고상들의 빰을 타고 흘러 내렸다.
다니던 학교 휴학계를 내고 군 징집을 기다리며 남은 일 년 남짓 고향으로 내려와 후배랑 화실을 열고 있었다. 그림을 배우러 오는 대부분이 후배들이나 몇 안 되는 초등학생뿐이니 돈이야 되겠냐만 그럭저럭 담배 값이나 좋아하는 돼지고기 두루치기에 막걸리 한잔 마실 수 있고, 가끔 캠퍼스랑 물감 충당 할 정도이니 뭐 그리 나쁜 살림은 아니었지만 가끔씩 도회서 학교 다니던 그때가 떠올라 무료하고 답답했었다.
카세트 테입만 뱅글뱅글 돌며 똑같은 음악만 지겹게 흘러나온다.
나무로 된 화실 바닥엔 내가 담배 찾으러 갈 때나 무심코 칸칸의 창을 바라보며 옮길 때 나는 발자국 소리가 삐걱대며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쩜 무료하고, 혼자만의 상념을 작심하고 떨쳐 버리려는 듯 누군가 화실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삐걱대는 소리가 들린다. 후밴가? 아님 친구 놈? 아니다. 이건 분명 여자가 다리에 한껏 힘을 주며 올라오는 최소한의 구두 소리였다. 눈은 쥴리앙 석고상을 지나 창밖 돼지네 엄마의 식육점을 향하고 있었지만, 청각에 관련된 모든 세포는 문으로 모여져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분명 지금쯤이면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서거나 '안녕하세요!' 소리가 먼저 들려야 할 터인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더 이상 궁금함에 참지 못하고 한손엔 담배를 든 채 돌아섰다. 어늘어늘한 창을 향해 빼꼼이 들여다보는 그림자 하나가 망설이고 서있다. 무척 궁금했지만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한참을 짜증 속에 망설이다 내가먼저 ‘누구세요?’ 라고 막 입에서 토하려는 순간 그의 인내심이 다하였는지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선다.
단발머리 뒤로 묶은 나지막한 여자. 유난히 뽀얀 얼굴에 뭣이 그리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담배연기 꽉 찬 답답한 화실 안으로 들어선다. 20대 초반의 아가씨, 간간이 면에 익은 얼굴이다. 화실근처 가까운 직장을 다니며 가끔 점심시간이면 깡총깡총 열심히 화실 앞 도로를 뛰어다니던 그 아가씨가 무슨 일로 꿉꿉한 날씨 속에 이 거지같은 화실을 찾아온 것이지 몹시 궁금했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어두운 화실 안은 그녀가 들어오면서 열어둔 문을 통해 바람이 불어온다. 순간, 내부 공기가 순환되고 있음을 알았다. 아마도 탁한 공기와 내부의 찌든 냄새가 참기 역했는지 몰라도 들어온 문을 닫지 않고 그렇게 서 있다. 애써 무거운 침묵을 즐기고 싶은 짖굿은 생각과 지금까지 무료했던 오전나절의 침묵을 반전 시키기라도 하듯이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짐짓 여기는 당신처럼 예쁜 아가씨가 들어올 곳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고개 깔아 눈에 낀 눈곱을 떨어내며 서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너무 무거웠던가. 달쭉달쪽 입을 움직이더니 또 한 번의 인내력을 실험하듯 한참 그러도 나서야 모기만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저... 그림배우고 싶어 왔어요.”
“아가씨가요?”
“예... 여자는 않되요?”
“안되긴요, 뭘 배우고 싶은데요?”
“그림요 미술시간에 하는거요.”
“아이참, 아가씨도 미술시간에 그림그리지 수학시간에 그림 배웁니까. 그라고 또, 미술시간에는 오만거 다 하는데 여기 와서 오만거 다 배울라꼬요?”
핀찬과 짜증 섞인 물음에 어느새 자신을 얻었는지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시선을 멀리하곤 줄줄 외듯이 말을 한다.
“석고데생이랑, 수채화랑, 유화랑, 동양화랑, 진흙으로 만드는 그것 까지요.”
처음엔 이 여자가 장난치는가 싶기도 했다.
“진흙이라니요? 아 항, 조소 말인가요? 그것 몽땅 다 배워서 뭐 할라꼬요? 그라고 그것 몽땅 다 배울라 카믄 여기 말고 큰 도시에 가서 하루 종일 여기 저기 쫒아 다니면서 밥도 몬 먹고 배워야 할낀데요?”
참으로 이상한 아가씨다 싶어, 또다시 담배를 찾았으나 빈 곽이였다. 재떨이에 비벼놓은 곳엔 더럽게도 침을 뱉어놓아 꽁초마저 건지지 못하자 갑자기 불쑥 나타난 이 아가씨가 귀찮아 진다. 쓸데없는 이야기 고만 하고 가란 듯이 외면해 버리고, 혼자 화실에 우두커니 세워둔 채 쌈지 돈 꺼 집어내어 우산꽂이 물기 줄줄 흐르는 우산 받쳐 들고 담배 한 갑을 사고, 돼지식육점 아줌마랑 어젯밤에 마신 외상술값 이야기 하다가 올라오니 그 여자분, 자리만 약간 옮겼을 뿐 그대로 곳곳이 서 있다.
“어, 아직 안가셨어요?”
“제 우산 들고 가셨잖아요.”
그랬던가? 내게 무시당한 느낌이었던가. 따지듯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야기 하다말고 혼자 횡, 하게 나가 버리면 어떻게요? 이야기 끝내고 가셔야 지 않나요?”
“어? 그래요! 미안합니더. 근데, 할 이야기 아직 남았남요? 나는 그런거 다 가르킬 능력도 없고, 재주도 없으께 딴데가서 한번 알아보소.”
“그럼, 수채화랑 석고 데생만 배울 게요”
“진작에 그러시지... 그란데 아까 그것 몽땅 배워서 진짜로 뭐 할라꼬요?”
물음에 그 대답은 엉뚱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각각의 대학에 들어가 배우는 것들이라서 대학 못간 자기는 너무 무능력 한 것 같아 오기가 발동해 조금씩 이라도 배워 보려 했단다.
큰 눈을 가진 예쁜 아가씨가 화실에 들락거리자 빈둥빈둥 하던 후배들도 열심히 하기 시작했고, 모두가 맘을 빼앗겨 버린 듯 경쟁이 되곤 했다.
그 여자 아니, 우리 화실의 마스코트처럼 되어버린 은혜가 출입하면서 차츰차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거지궁궐 같던 화실이 깨끗해지기 시작했으며, 가끔씩 안고 오는 꽃다발이 화병에 꽂혀 분위기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켜 놓고 있었다. 어느 샌가 커턴을 가져가 빨아오기도 하고, 화실 나무 바닥엔 후배들 충동질 하여 빤질빤질 하게 왁스칠이 메겨져 있기도 했다. 없었던 실내화가 등장하고, 입구에 ‘신발을 벗고 들어갈 것!’ 이란 명령조의 글귀가 붙혀 지기도 했으며, 친구라고 데려와 인체 데생 모델을 삼기도 하고, 주인인 나보다 훨씬 주인 같은 은혜 덕분에 난 그저 묵묵히 내 작업만 열심히 하면 그만 이었다. 단, 불편한 것이 있다면 ‘금연’ 이라 붙여놓은 쪽지! 난 그저 아무 불만 없이 스스로 따랐다.
그러나 어쩌다 그녀가 아프거나 바쁜 일로 인해 하루씩 화실을 비우는 날이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상한 날이 되어 버렸다.
허전하고, 뭔가가 비어있는 듯, 알쏭달쏭한 그리움이 밀려와 작업마저도 포기하곤 했다. 그래서 가끔씩 빠져 나갈 수 없는 궁리 끝에 회식이다, 야외 스케치다 하면서 이벤트 꺼리를 만들기도 했고, 늦은 밤, 스승과 제자라는 굴레 속에 화실에서 소주 한잔의 행복 뒤에 은혜가 사는 교장 사택까지 바래다주는 행운을 가끔 맛보기도 했다. 은혜 아버진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고향에서는 여타 교장 선생님과 달리 땅달이 욕쟁이로 소문난 아주 특이한 선생님이셨다.
단체로 야외 스케치 갈 양이면, 초등학생 소풍 전날처럼 가슴 설레임에 뒤척이는 내가 우습기도 했지만 막상 얼굴을 대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덤덤한 모습으로 나의 속내를 들켜 버릴까 한정되고 일정한간격의 관계를 유지 하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타지로 유학 갔던 미술학도 친구 놈들이나 선배들 하나둘씩 모여 화실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화실은 더욱 복작 거렸고, 여전히 은혜는 화실 환경에 애를 쓰고 있었고, 조소를 전공하는 내 친한 친구 완이와도 스스럼없이 지내게 되었다.
짝사랑은 그렇게 비를 타고 왔건만. 어느 지랄 맞을 가을날 늦은 오후, 군 징집영장이 날라 왔다. 삼 개월을 앞두고서 그때부터 하던 모든 작업은 그만두고, 화실은 후배랑 완이에게 부탁하고 홀로 무전여행을 떠났다. 바다를 보면 그 가 생각났고, 우연히 들린 농촌마을에서 며칠간 일 해주며 여비 마련을 위해 콩죽 같이 땀 흘려 일 할 적에도 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당췌 일이 되질 않는다. 비우러 간 것이 아니라 확인만 하고 온 꼴이었다. 용기를 내었다. 돌아가 사랑을 고백하리라 맘먹었다. 가슴에 불을 품고 뜨거운 가슴을 안고서 돌아온 그곳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질 못했다.
화실로 돌아가던 그날 어둠속으로 망할 놈의 비가 또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속에 나란히 앉아있듯, 완이랑 은혜가 다정한 모습으로 늦은 밤 화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올라오는 질투를 짐짓 애써 무시하고 반갑게 해후를 했지만 아리는 통증이 몰려온다.
“어, 니 일찍 왔네!”
“그래 임마, 은혜를 니놈 한테 맡겨 두는 것이 불안해서 일찍 왔다.”
“문디자슥, 별 씨잘데 없는 걱정을 하고 지랄이네 곧 군에 끌려 갈 놈이... 걱정마라! 은혜는 내가 돌봐 줄텐께 니는 열심히 좆뺑이 치다가 오믄 되는기다”
완이의 놀리듯 뼈있는 농담 속에 불안은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매번 그렇듯이 항상 고개를 15도 숙인 체 한 번도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본적이 없는 그 모습 그대로 술잔 가득 부어 주는 막걸리를 단숨에 비워 버렸다. 속에 아리던 그 무엇이 쓸려 내려가는 느낌이고, 그리움에 몸을 비워두던 그곳을 반대로 채워주는 느낌이었다.
얼마간의 답답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순간, 그 침묵을 깨듯 화실 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그때 서울 사는 이가 이 밤중에 들어선다. 깜짝 놀라 어정쩡한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다보기만 했다. 나를 보려고 서울서 천리 길을 달려온 이였다. 반갑게 호들갑이라도 떨어야 했으나 반갑지가 않다. 이는 같은 과 학생으로 가끔씩 궁상맞은 독학생의 살림에 보탬이라도 하라는 듯이 연탄이나 라면상자나, 그것도 일부러 나를 위해서 최고급 유화 물감을 항상 준비해 두곤 했었다. 덕분에 추운 겨울날 따뜻한 라면 국물에 찬밥이라도 말아 먹을 수 있었고, 후끈후끈한 연탄난로 위안삼아 밤샘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런 이 에게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워 겉으론 허풍 뻥뻥 떨어가며 큰 소리 치곤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냥 덤덤히 대충 넘겨 버리곤 주위에서만 뱅글뱅글 돌며 그와의 적당한 거리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휴학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오기 전, 작업실로 찾아와 기어이 눈물지으며 사랑 고백하더니 농담 같은 내 반응에 점지라도 해 둬야 할 것 같은지 막무가내로 자기를 열어 제치던 그 이가 찾아온 것이다.
순간, 은혜의 얼굴에 변화가 일며, 알듯 모를 듯 질투의 그림자를 발견하곤 그 순간에도 내심 기뻐했다. 천리 길을 달려 왔으니 반갑긴 했겠으나 어색한 포옹에 화들짝 놀라 손을 풀고는 멋쩍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몹쓸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은 내 웃음에 이는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때 완이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알아차리고는 밖으로 나가서 한잔씩 더 하자는 제의를 했으나 은혜는 내려 깐 눈으로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어 버린다. 대책 없이 완이와 둘만 화실에 남겨 두고, 이만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한여름 장마도 아닌 것이, 이놈의 지겨운 비...’ 혼자 중얼거린다.
시장 골목골목 찾아간 막걸리 집에 앉아 부침개 몇 장 놓고 이랑 마시는 술도, 한참을 떠들며 깔깔거리는 웃음도 도무지 머리에 들리지 않았다. 온통 맘은 화실에 남겨둔 그녀 생각 뿐 이었다. 술에 약한 이는 웃었다 울었다가 가슴앓이 하는 내게, 가슴앓이 하는 자기의 존재를 확인 시키듯이 퍼부어 댔다.
“아까 그 여자 누구야? 뽀얗게 생겨서 너가 좋아하게 생겼던데. 응? 얌마! 그 여자 누구야? 애인이야? 너랑 같이 잤어? 얌마 이 새꺄, 너 그 여자 사랑해? 응?”
막무가내로 쏟아 뱉는 이의 말에 의외의 그리움이 치밀어 오른다. 멀리 서울서 사랑 찾아 온 한 여자를 앞에 두고서. 그동안의 이의 도움 없었으면 이마져 학업을 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르는 그 공덕을 애써 무시하면서... 시끄럽다고 술집 아줌마 잔소리를 한참 듣고서야 용기를 내어 간신히 업고 소낙비 맞아가며 밖으로 나왔다. 작은 읍내의 불빛은 이미 꺼져가고 희미한 그림자만 남기며 그렇게 어둠은 깊어가고 있었다. 몇 번을 쉬어쉬어 엉망이 된 이를 우리 집 내방으로 가 눕혔다. 이상한 눈총으로 바라보시는 어머니의 눈길을 대충 버무려 놓고, 화실로 달려 가 보았으나 이미 불은 꺼지고 없다. ‘모두들 가버렸나... 날 기다리긴 한 건가?’ 화실 소파에 앉자말자 알콜기와 피곤기가 밀려 금방 잠이 들어버렸다.
아침이 되어도 조용하다. 머리가 어지럽고, 구역질이 난다. 가만, 오늘이 일요일 인가? 담배를 찾았으나 몽땅 비에 젖어 필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뭉쳐진 재떨이에 그나마 온전한 꽁초를 찾아 입에 물고 길게 내품는다. 얼마 안 있어 이가 화실에 들어선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시고 그라노. 밥은 챙겨 묵었나?”
“니네 어머니가 콩나물죽 끓여서 주시더라, 얼굴도 못 들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도망 처 버렸지 뭐니, 이젠 그럴 일 없을 꺼야, 어제아침에 일어나니 너가 그려준 내 초상화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무작정 너 보고 싶어 달려 왔지만 오는 내내 후회도 했다. 너 군에 가기 전에 얼굴 한 번 더 보기도 할 겸, 바람도 쐴 겸 해서 그냥 달려 온 것뿐이야. 이젠, 더 이상 귀찮게 하는 일 없을 꺼야! 잘 있어, 군대 생활 잘 하고.”
이를 버스 터미널에서 그렇게 보내 버렸다. 단 하루 밤새 혼란만 더 가중시켜 놓고 그렇게 가 버렸다. 그렇다고 더 이상 이를 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만 놓아 주어야 최소한의 양심 있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저 아이는 가슴에 화를 품고 사는 아이라서 친구 관계도 안 된다. 역마살 끼도 있는 듯 하고 결국엔 가슴에 큰 상처만 남을 게다.’ 는 이의 어머니 말씀이 떠오른다. 아마도 맞는 말이었지만, 그것은 핑계였을 뿐, 궁상스럽게 사는 이 촌놈의 생활에 실망한 말이었을 것이었다.
그렇게 이를 보내고 난 뒤 화실로 돌아와 혹, 기다리면 돌아올 것인가 싶어, 조용한 화실에 누워 은혜가 꽂아놓은 계량국화 큰 송이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그리다 만 정물화엔 마른 명태랑 사과, 대파 몇 줄기가 지저분한 천에 올려져 있다. 뒤편, 흐릿하게 그려진 노란 국화 송이도 보인다.
저녁이 되어서야 완이가 나타났다. 둘이서 앉아 있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나를 찾으러 가자하더란다. 그때부터 내가 갈만한곳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갔다는 그 말을 들었다. 그때부터 은혜는 화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연유인지 궁금했지만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한다는 먼 친척 되는 후배 놈 에게 소식을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좋아한다고 가슴이라도 얼어 제쳐볼 걸 그랬나 보다. 국화 향이 시들시들 해 지고 있었다.
가슴 한 구석에 밀쳐져 있는 그녀에 대한 감정을 철저히 숨겨둔 채로 그렇게 시간은 지나갔고, 하던 화실도 접고 쌀쌀한 겨울이 코앞에 다가 올 때쯤 입대를 하루 앞두고 그를 찾아갔다. 먼저 전화를 하였으나 교장으로 재직 하시는 은혜 아버지의 욕설과 함께 딱, 잘라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린다.
“이 새끼야, 은혜는 왜 찾아. 니놈이 돈빌려 준거 있나? 은혜 없어.”
친구들 환송연 해 준다고 모여 있을 때 달빛을 달려 찾아갔으나 굳게 닫쳐버린 은혜의 마음처럼, 커다란 나무 대문이 가로막아 쉽게 열릴 것 같지 않다. 그냥 그렇게 서 있었다. 별을 올려다보는 눈이 시리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들려올 뿐 죽은 듯 조용한 집안엔 희미한 백열등만 마루에 켜져 있을 뿐이었다. 술김에 대문에 발길질 한번하고 돌아서 왔다.
일주일간 유격훈련으로 고단한 몸을 이끌고 내무반으로 들어 왔을 때, 고참병이 전해준 편지 한통.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국화향기 가득한 네모난 화장지 펴서 볼펜으로 꼭꼭 눌러 쓴 편지엔 몇 줄 안 되는 글자들이 약 올리듯 써져 있다.
“이렇게 불쑥 소식 전하는 걸 용서해 주세요.
나 일주일 전에 결혼했어요, 웃음.! 언니 대신 내가 결혼 해버렸죠 뭘.
참으로 웃기는 인연이죠? 누구랑은 그렇게도 닿지 않던 인연인데...
부디 잘 있어요! 몸조심 하시고!“
언니대신 자기가 결혼 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누가 보쌈이라도 해 갔단 말인가, 웃기는 인연이라니, 혼란스러웠다. 하루하루가 무겁게 지나갔다. 힘들던 졸병 시절도 내 몸을 더욱 혹사 시키듯이 굴렸다. 모든 작업에도 앞장서고, 사격훈련이나 부대 측정훈련엔 자진해서 참여했다. 모든 일을 잊기라도 하듯, 힘들어 하면 더 힘들어 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령이나 잔 꽤는 더 피곤을 몰고 온다는 사실도 알았고, 악을 쓰듯 하는 군 생활이 훨씬 편하고 좋았다. 누군가 집합해서 얼차려 주길 기다렸고, 한 번씩 심심하면 사고를 치기도 했다. 입대 후 처음 일주일 포상 휴가를 나오던 날, 완이에게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완이가 다니던 대학에 입학하고서 대학 다니는 중간 중간 내 면회 갈 거라고 두터운 국방색 목도리를 짜고 있었단다. 완이로서는 내심 질투도 나곤 했단다. 나의 존재는 은혜 가슴에서 완전히 지워 진줄 알았는데 학기 초부터 나의 이름을 달고 다니더란 것이다. 선배든 후배든 만나면, 나에게 대한 이야기는 끝날 줄 모르더란다. 언제부터 나의 표정, 말투, 몸짓까지 흉내를 내며 가끔 슬픈 눈으로 이야기를 줄줄 엮어 냈단다. 그래서 자기 과 학생들 중에 내 이름을 모른 이가 없을 정도로 되어 버렸다며, 간혹 선배들이 유혹을 하면, ‘너 누구 휴가 나오면 맞아 죽어!‘ 하며 버무리곤 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방학을 앞둔 시점에 하루는 불쑥 나타나 이죽이죽 웃으며 한다는 말이 자기 결혼식 구경 오라고 하더란다.
은혜에겐 두 살 터울의 언니가 하나 있다. 선을 봐, 결혼 날짜까지 잡아놓고 결혼이 임박해 오자 결혼식 이틀 전에 도망을 처 버렸다는 이야기며, 은혜 아버지는 집안에 망신살 뻣칠까 어쩔 수 없이 은혜를 신부 드레스 입혀서 입장시켜 버렸단다. 그리곤, 지금까지 언니대신 그렇게 살고 있다는 웃지못할 슬픈 이야기를 전해 준다.
The Mission: Gabriel's Oboe (3:13) / The Falls (2:28)
'단상 - 횡설수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야근중 새해인사^*^ (0) | 2005.01.02 |
|---|---|
| 반토막 인생(2) (0) | 2004.12.22 |
| 딩굴딩굴... (0) | 2004.12.20 |
| 짤록이(2)- 복수의 칼날은 새벽에 이루어 졌다. (0) | 2004.12.14 |
| 짤록이... (0) | 2004.11.20 |